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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음악, 동요보급운동 -강신명 목사의 『아동가요곡선 300곡』(1940)_이혜정(영남신학대학교 조교수)

찬송 가사를 순우리말로 지어 부른다는 것은 곧 조선인만의 신앙고백을 의미한다. 개화기에 유입된 서양음악과 일본창가의 영향으로 조선인들은 전통음악 이외 외래음악의 곡조에 익숙해져 갔지만 우리말 가사창작활동을 통해 새로운 문화변용을 만들어갈 수 있었다. 조선어 가사로 된 찬송가사를 적극 권장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러므로 조선인 신자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조선어 동요와 찬송작사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으며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신앙의 토착화를 이루어갈 수 있었다.

동요는 곧 조선의 민족의식과 정서의 표출이다. 곡조는 서양곡조나 일본곡조를 따를 지라도 그 안에 있는 가사는 순수한 조선인의 의식과 정서를 담고 있다. 조선 후기, 개화를 시작한 격동기에 지식인이나 양반이 아닌 이들이 남겼던 순수한 평민들의 민족의식이자 민족정서를 담고 있는 것이 동요이다.

강신명은 목사임에도 불구하고 신앙적 색깔을 거의 넣지 않은 순수한 동요창작에 집중하였다. 이것은 당시 동요창작운동의 제일 목적이 순수한 동심함양에 있었으며 교회 뿐 아니라 모든 조선 어린이들이 부를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있었다. 조선인의 순수한 민족정서와 동심을 함양하면서 조선인의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동요보급운동과 동요창작운동의 진정한 목적이었다. 여기에는 개별 신앙을 넘어선 민족정신과 애국정신의 발현,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공유되었다. 즉 신앙의 공공화, 신앙의 공공성이 형성되었던 시대였다.

그러므로 동요보급운동과 동요창작운동은 간접적인 독립운동이며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이었다. 이미 강신명은 동요집 발간으로 간접적 독립운동의 죄명으로 벌금형을 선고받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몇 년 후에 동경에서 동요집을 재발간하였다. 즉 동요집 발간이 단순히 음악적 목적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1910년부터 이어진 순우리말 가사창작, 1920년대의 색동회의 동요창작과 동요보급, 1930년대 동요창작과 보급운동이 모두 간접적 저항운동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즉 동요는 조선인의 정체성을 지키고 전파하는 동시에 조선어교육을 할 수 있었던 효과적이며 효율적인 방법 중 하나였다.

개화기의 독립운동은 몇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직접적 독립운동은 의병, 봉기, 테러와 같은 군사적, 물리적 참여방법이 있으며 간접적 독립운동으로는 교육과 계몽을 통한 인재양성이나 언론, 예술을 통한 간접적 표현으로 저항하는 방법이 있었다. 여기에 동요보급운동과 동요창작운동, 순우리말 가사창작운동 등은 간접적 독립운동, 저항운동으로 분류될 수 있다. 특히 찬송가 가사 창작운동은 조선인의 신앙고백인 점에서 앞으로 연구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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